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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있어서 'Heavy Listener'로 비춰지는 듯 하다. 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일단 음악을 '찾아 듣는' 일 자체가 거의 전무한 한국에서, 나는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이니까. 다만, 나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장난삼아 리스너의 단계 혹은 진화과정에 대한 글들이 돌아다니는데, 결국 나도 어떻게 보면 그 단계를 밟은 거니까.


 내가 음악을 처음으로 '온전히 듣게' 된 것은 중2 무렵 처음 핸드폰이 생겼을 무렵일 것이다. 여기서 온전히 듣는다는 말은 주위에서 들리는 음악들, TV에서 나오는 음악들을 듣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얻은 음원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렵 나는 멜론을 이용해서 유행하는 노래들을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뭐 쉬운 일이다. 들어가면 딱 가요 순위가 나와 있고, 그걸 차례대로 튼 다음에 거기서 괜찮다 싶은 노래들을 핸드폰으로 집어넣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다만 이 때부터 싹이 보였던 것이, 그 당시의 나는 그냥 뭐든지 '달라 보이고 싶다'라는 10대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지라 정말 괜찮은 노래가 있다 싶으면 그 노래를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노래가 담긴 앨범을 클릭해 보는 정도의 수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불과 1년 정도 뒤에 지금의 나를 만든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한국의 밴드 EVE의 노래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중3일 때면 대충 이들이 6집까지 내고 쉬고 있을 때였던 것 같은데, 어쩌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나는 최신 노래가 아닌 노래를 내 귀에 집어넣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가 너무 좋았고, 이들의 예전 노래를 들었는데, 그것도 좋았다. 그날로 최신곡으로 도배되어 있던 내 핸드폰은 이들의 노래로 싹 바뀌었다. 그 동안 '최신 음악만 들어야지'라고 생각하던 일종의 불문율을 깨뜨려 버린 것이랄까.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선을 넘었다. 이들 앨범을 뒤지면서 이 노래 괜찮다 싶어서 넣고 넣고 보니, 어느덧 한 앨범의 전곡이 핸드폰에 들어가는 경우가 생겼고,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뮤지션이 왜 싱글이 아닌 앨범을 만드는지에 대하여 고민해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쨌건 간에 '처음'의 의미가 있어서 그런지 EVE의 앨범들은 그 당시 듣던 노래들 대부분이 지워진 내 음원 파일들 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들과 비슷한 스타일, 소위 '록 발라드'라는 정말 기괴한 이름이 붙는 노래들을 찾아 들었다. 그렇다. '찾아' 들었다. 그런 식으로 내 플레이리스트는 꾸준히 채워져 갔다. 그러다가 5집을 낸 Nell 노래를 듣고 이것도 괜찮다 싶어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웃긴 건  예전의 나는 이들의 'Stay'를 처음 듣고 뭐 이런 노래가 다 있냐라고 질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플레이리스트는 채워져 갔다. 


 그러다가 한국 인디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대충 Nell, 내귀에도청장치, Trans Fixion, Vanilla Unity, Rocket Diary 정도를 들었다. 그 무렵의 인디의 큰 축을 담당하던 펑크는 그냥 뭔가 듣는 재미가 없어서 듣지 않았다. 듣는 그룹들을 넓혀가는 방식은 간단했던 것이 어떤 경로로 한 그룹을 발견하면, 이들과 비슷한 그룹을 찾아 듣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렵 처음 듣게 된 피아는 처음에 듣기 되게 힘들었다. 그냥 비슷하니 계속 들어볼까라는 생각으로 플레이리스트에 억지로 끼워넣어 듣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졌고, 이들의 2집을 즐길 수 있게 되던 무렵부터는 Rock이라는 장르 자체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시끌시끌한 이들의 1집을 듣고는 '이것보다 더 시끄러운 음악은 못 듣겠구나'와 같은 선을 긋게 되었다.


 그 뒤로는 외국으로 시야를 넓혔다. 그 동안의 과정에서 음악적 취향에서 보컬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줄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뭐 처음에는 외국 Rock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처음 추천받는 Muse, Nirvana, Linkin Park, My Chemical Romance 등등을 들었고, 그 이후로는 Korn 같은 뉴메탈류로 (다만 림프비즈킷은 저 당시에도 그냥 구려서 안 들었다.), 다시 The Used나 Finch같은 메이저 Emo 음악들로, 다시 시애틀 그런지로(이 때 Soundgarden이 영 귀에 안들어와서 나는 메탈이 내 취향이 아님을 확신했다. 다만 Alice in Chains는 정말 많이 좋아했다.), 다시 포스트 브릿팝류로... 이런 식으로 일종의 음악적 조류 단위로 건너다녔다. 이 무렵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는 일종의 자부심에 쩔어서 지냈고, 한국 대중음악은 쓰레기고 인디가 짱임ㅇㅇㅇ 뭐 이런 식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언행들을 일삼았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그저 웃기다ㅋㅋㅋ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왔고, 이 무렵부터는 내 취향을 떠들고 다니는 빈도가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위의 저급한 생각은 여전했지만, 이걸 떠들어 봤자 별로 소득도 없다는 걸 느끼기도 하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교와 뭐 비스무리한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과정이 아마 내가 음악을 듣는 과정 중 제일 긴 시점이다. 이 시점에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Rainy Sun 등등을 들으면서 이들이 왜 내가 처음 듣던 Nell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까를 나름 깊게 고민해보고는 '음악적인 개성'이란 것에 대해 어렴풋이 눈을 떴고, Radiohead의 4집 이후 앨범을 들으면서 그냥 뿅뿅거리는 이상한 음악 정도로 치부하던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사운드(음악 장르로서가 아닌)에 대한 저항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체기가 왔다. 지금까지 내가 음악을 듣던 방식인 '한 다리 건너 듣기'로는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애초에 90년대를 중심으로 한 신에서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이걸 뛰어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일지도. 그래서 잠시 음악 듣는 것이 재미없기도 했다. 맨날 듣는 것이 그게 그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뭔가 내가 쓸데없는 자존심만 남아서 이런 음악들을 듣고 앉아있나 싶기도 했고. 그 무렵 터진 한국의 아이돌 붐을 보며 그래도 내가 저거보다는 나은 음악 듣는다고 자위하기도 하고.


 이 상황을 깨준 계기는 Arcade Fire와 Interpol의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Arcade Fire의 음악은 지금까지 내가 구분짓던 어떤 '장르'로 설명하기가 되게 힘들었다. 다시 말해 한 장르에 얽혀있지 않았다. (이 무렵 나는 Radiohead를 재발견했다.) 그리고 이들이 인디에서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피치포크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비슷한 무렵 알게 된 Interpol은 그냥 내 정서를 지배했다. 이들의 음악은 음악을 '장르'로 구분해 듣던 나를 '취향 혹은 스타일'로 구분하도록 바꾸었다. 이들을 계기로 200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두고 있는 음악들을 마구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금씩 Rock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Portishead, LCD Soundsystem처럼 더 이상 Rock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룹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고, 최후에는 Aphex Twin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음악을 듣는 데에 있어 평론이나 '올해의 앨범 순위' 같은 리스트들을 활용하면서 이리저리 기존의 내 취향과는 접점이 없는 새로운 그룹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한국 메이저 음악들이 쓰레기 100%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는 것도, 한국 인디에도 쓰레기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뭐 이 '쓰레기'라는 단어는 철저히 내 주관에 의한 단어이다. 덧붙이면, '주관'이라는 주석을 다는 방식 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 법을 익혀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현재이다. 그냥 이리저리 검색도 하고, 누구누구와 비슷한 음악들도 찾고, 그냥 지나가는 음악 중 괜찮은 것도 집고... 뭐 이런식으로 그냥 편하게 음악을 듣는다. 사실, 음악 취향이 뭐 거창한 거라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웃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만 아직도 내 취향은 Rock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일렉트로니카의 비중이 점점 커져 또 다른 축으로 올라가고 있지만서도. 아직까지 나는 힙합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즐기지는 못하고, 한국의 최신 음악들을 노래방에서 열심히 부르지만 내 플레이리스트에 넣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조차도 굳이 찾아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지면서 이게 내 취향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글을 써 보니까 뭔가 쓸데없이 되게 파란만장한 것 같다. 별로 파란만장하거나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데. 그냥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와 같은 식의 기록으로서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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