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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를 다 읽었다. 읽으면서 이런저런 19세기 유럽의 사건들에 대한 공부도 틈틈히 하게 되었고, 평소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같이 역사를 적당히 섞은 음모론스러운 게임들도 하곤 했던지라 재밌게 읽었다. <장미의 이름>과는 달리 무대가 전 세계를 오가고 있고, 현대인들에게 있어 조금 더 친숙한 주제이기도 하기에 중세의 신학적 논쟁이 주요 테마 중 하나인(그걸 공부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지만) <장미의 이름> 같이 머리를 팽팽히 굴릴 필요는 없어 쉽게 읽어내려갔다.


 앞서 언급한 두 소설 외의 움베르트 에코의 다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움베르트 에코 소설들 전반에 깔려 있는 주제의식 중 하나는 '허구의 실체화에 대한 비판'으로 알고 있다. 이 주제의식은 <프라하의 묘지>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장미의 이름>과는 차이를 갖고 있는데, 주인공들을 통해 반동 인물이 논박되는 형식을 갖는 <장미의 이름>과 달리, <프라하의 묘지>에서는 주인공 자체가 반동 인물로 자리잡아 음모론을 양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시점에서 움베르트 에코의 정신나간 수준의 지식이 발휘되어 주인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실존 인물이고,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 주인공의 손에서 창조되었는지를 서술하는 방식 자체가 마치 실제 역사 수준으로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2.

 

그렇기에 이 책이 막 나왔을 당시의 유럽에서는 '움베르트 에코 현상'이라 불리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는 <프라하의 묘지>가 <다빈치 코드> 같이 음모론을 소설의 재미로만 얄팍하게 활용하는 수준이 아닌 매우 정교하게 배치하였기에 벌어진 논쟁으로, 독자들이 소설의 수준 높은 정교한 장치의 구조를 끝내 파악하지 못하고 소설의 '설계된' 음모론이나 인종차별적 논조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에 대한 논쟁이었다. 나 역시 19세기 중후반의 역사나 이 시대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면 정말로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런 논쟁은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 지 어려운 현 시대에서 생각할 가치가 있는 논쟁인 듯 하다.



3.


 <프라하의 묘지>에서는 하나의 음모론이 어떤 방식으로 창조되고 살이 붙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지를 주인공의 손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원은 단순히 주인공이 할아버지에게 받은 뒤틀린 조기교육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작중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계속 강조되는 내용 중 하나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누가 무엇을 베꼈고, 어디에서 이걸 따 왔고 등등을 신경쓰는 사람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요즘의 SNS로 정보가 퍼지기 쉬운 환경 상, 어떤 정보가 사람들을 통해 널리 퍼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하나의 정보가 생명력을 얻고 잃는 기간 자체도 매우 짧아졌다. 특히나 현 정권 하에 사실상 기득권 계층과 이들을 밀어내려는 계층 사이의 갈등으로 압축되는 다양한 사회적 논쟁들(심지어 국정교과서 논쟁도 이런 식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중 일부는 Reference를 일반인 수준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뜬구름잡는 수준의 이야기들도 있다. 심지어 음모론을 고발하기 위해 만든 이 소설조차 너무 잘 짜여졌다는 이유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 알기가 힘들어지는 듯 하다. 말 그대로 암울한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움베르트 에코 현상'이 소설에서 고발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시모니니가 문서를 위조하던 19세기 후반과 달리 지금은 수많은 대중들이 그 당시보다 쉽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다. 음모론이 그만큼 퍼지기 쉽다는 문제 역시 않고 있지만, 어찌 되었건 이런 음모론은 결국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는 대중들이 과거보다 똑똑해지고 있다고 믿는 낙관론자이고, 그렇기에 많은 대중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공방이 오가는 것으로 음모론의 본모습을 과거보다는 빠르게 밝힐 수 있다고 믿는다. 



4.


 하지만 아직 현실은 좀 요원하다. 광우병 사태만 보아도 사람들은 광우병이 정말로 위험한지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아이유 관련 논란들도 이제는 공격을 위한 증거가 '만들어지고' 있는 판이고. 나만 음모론을 파헤치면 뭐하나, 그걸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데. 이 주제는 아마도 내가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할 논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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