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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보고 느낀 점들 간단히 정리.
1.
정치인들은, 특히 박근혜 후보는 어쨌건 멘탈이 단단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이정희 후보가 그렇게 공격함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는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다른건 몰라도, 박근혜 후보의 멘탈 하나는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로 튼튼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 후보는 본인이 속한 새누리당의 특성이나 그녀가 가진 고유한 배경들 때문에 네거티브 공격을 거의 평생 동안 받아왔을 텐데, 이게 약이 되었을지도? 하지만 평생 이런 공격을 받고 살아간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긴 하다. 난 새누리당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간 박근혜는 조금 동정이 간다. 물론 이건 대통령을 뽑을 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아니다.
2.
이정희 후보라는 폭탄마 때문에 불 건너 강 구경하듯 TV로 토론회를 보던 내 입장에서는 토론회가 상당히 재밌게 흘러갔다. 애초에 이정희 후보는 본인이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공격에만 집중한 것 같다. 박근혜 후보도 공식 석상에서 이 정도의 공격을 받아보는 것은 난생 처음일 것 같다. 어쨌건 간에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유효타를 여럿 날리는 것에 성공했고, 박근혜 후보가 정말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걸 꽤 흥미롭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문재인 후보 입장에서는 이정희 후보에 의해 거의 공기화되었기 때문에 공격할 거리를 이정희 후보가 여럿 던져줬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애매할 것 같다. 오히려 본인의 주장이나 색깔이 완전히 묻혀버렸기 때문에 불리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 토론의 승리자는 확실히 이정희 후보인 것 같다.
3.
하지만 그렇다고 박근혜 후보 쪽이 불리해진 것은 전혀 아니다. 비록 이정희 후보가 토론에서 이겼을지언정 대중들에게는 빅엿을 먹게 되었으니까. 이정희 후보는 제한된 토론 시간 동안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한 번이라도 더 박근혜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수많은 까일 거리들을 만들어버렸다. 일단 그녀를 절대 떠나지 않을 종북 문제는 이번 토론을 통해 말 그대로 폭발해버렸고, 비록 본인이 대통령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공약'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한 모습은 토론회에 나올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일 정도였다. 이 문제들은 오늘의 토론회 전체를 말 그대로 가려버렸다. 분명히 정말 잘못된 것들이고, 이정희 후보는 까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정희 후보는 일당백의 기세로 토론회에 나왔을지언정 그녀는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정말 아무런 구속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희 후보의 문제들 때문에 이른바 '진보 진영'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단체로 싸잡아 공격당할 것이 뻔하고, 정치성향이 대북 문제를 제외하면 오히려 새누리당에 가까운 문재인 후보도 싸잡아 공격당할 것이다. 이정희 후보가 공격에 성공했더라도, 공격수 자체가 일종의 반칙을 썼다는 식으로 다가와 이정희 후보의 공격이 성공한 것보다는 '반칙' 자체에 더 초점이 맞춰질 것은 당연지사고.
4.
토론회가 끝나고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국민들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뽑는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이정희 후보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거나, 아니면 가끔씩 박근혜 후보에 가해진 공격들에 대해 다룬다. 이러려고 토론회를 연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이건 애초에 공약보다는 네거티브에 집중한 反 박근혜 진영의 자멸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가 어떤 내용의 토론이 이루어졌는지보다는 '얘가 실수를 하는지 안 하는지'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에 공약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도 알 수 있다.) 분명 이 토론회를 통해 박근혜 후보 쪽으로 지지 방향을 돌리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이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대부분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후보들이 보여주는 네거티브한 면들이 공약 이상으로 자신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대중'이라는 집단의 거의 본능에 가까운 모습이다. 민주통합당이 계속 네거티브 공세를 하는 것도 결국에는 이게 먹히니까 하는 거다. 그래도 그 당시 확실하게 밝혀지지도 않았던 아들 군대 문제로 낙마한 10년 전 이회창 후보 시절에 비하면 네거티브 공세 외의 면모들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편이기에 국민 의식이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진다. (물론 네거티브 공세가 안 먹히는 이유는 이게 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격하는 사람들의 자멸이 더 큰 것 같다.)
5.
이번 토론회에서 가장 크게 당한 사람은 아마 문재인 후보일 것이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보여준 것이 없다.' 대북 문제에서 비난을 받고, 그 외의 공약들은 네거티브 공세에 묻혀 있고, 새누리당의 더러운 면을 공격한다는 자들이 깨끗하지도 못하고. 그는 이번 토론회에서 어떻게든 한 방을 성공시키지 않는 이상 계속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조건 하나 더 달면, 네거티브 외의 모습으로 한 방을 날려야 한다. 그래야 새롭다고 느껴질 테니까. 그런 점에서 민주통합당은 정말 무능력한 집단이라 문재인 후보의 개인 플레이라도 어느 정도 성공해야 하는데, 이번 토론회의 주연은 이정희 후보가 가져가 버렸다. 우리나라의 특성 상 중박만 계속 치는 사람은 결코 주목받지 못한다. 특히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대선에 있어서는 이정희 후보처럼 집단 공격을 받는 입장이 오히려 더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고. 아직 토론회는 2번 더 남았는데, 여기서 그는 어떤 식으로던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
6.
개인적으로 나는 이번 대선을 지난 번 이상으로 뽑을 사람이 없는 선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의 생각이 일치하던 일치하지 않던 간에 대통령을 할 만한 능력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투표는 하겠지만, 결국 예전에 비해 전혀 바뀌는 것이 없는 정치 구도가 투표 의욕을 많이 떨어뜨린다. 안철수 후보의 신선함은 말 그대로 '다음을 기약한다'로 끝나버렸고. 이 판이 한 번 크게 뒤집어지지 않는 이상은 내가 4번 글에서 말한 대중 의식이 크게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이끌 변화가 '위에서부터의 변화'보다는 '밑에서부터의 변화' 쪽이 더 희망적이고 이 쪽의 성공하는 데까지 걸릴 시간이 더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안철수는 정말 별난 사람이긴 하지만 과거와 달리 현재는 '위'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이뤄질 변화가 좋을지 나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변화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가능하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변화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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